눈을 깜빡여 시야를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애써보았다. 어느 정도 행위를 반복하니 시야는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정신은 아직도 멍했다. 새삼 충격이라도 받은 건가. 닌자 실격이다 싶어 입 안의 살을 아플 정도로 물자 온 몸을 검게 물들인 사내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칼끝은 타케야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고, 어련히 피할까 싶어 지켜보려던 나는 주저앉아 있는 타케야의 모습에 멍하니 그를 부르고야 말았다.

 

하치자에몽?”

 

아사히나 선, .”

 

며칠 전부터 다리가 아프다며 투덜거린 게 장난은 아니었는지 꽤 힘겹게 답하는 목소리에는 고통을 억누르는 느낌이 담겨있었다. 검은 사내와의 거리는 이미 상당히 좁혀진 상태였고, 잿빛의 소년은 빈틈투성이인 채로 그 무엇도 하지 못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안 돼. 무언가에 홀린 듯 다리를 움직였다. 몸이 상당히 가벼움을 느끼며 타케야의 팔을 휘어잡았을 때는 받아쳐내기엔 늦었음을 깨달은 상태였고, 그를 감싸며 넘어지는 도중 날카로운 칼날이 어깨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

 

선배!”

 

젠장, 쥐새끼 같은 게!”

 

사내가 끝장을 내려는 듯 욕설을 읊조리며 단도를 들어올렸다. 죽이는 편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것을 마지막으로, 머릿속의 필름이 끊겼다.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푹 쉬도록 해라.”

 

고개를 꾸벅 숙이고 교장실에서 나온 유우는 가볍게 기지개를 편 후에 주위를 한 번 빙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소음이 나는 것을 보아하니 위원회의 활동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상태인 모양이었다. 이제 학급위원장위원회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그의 위로 둥그런 그림자가 졌고, 의문을 담은 눈동자가 위를 향하자 아주 익숙한 사람이 단번에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케이케-.”

 

코헤이타?!”

 

돈돈!!”

 

둔탁한 타격 음과 함께 유우의 앞 쪽으로 살인무기가 된 공이 날아왔다. 경악어린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거리를 가늠해보니 저에게로 오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옆으로 피하자 마루 바로 앞의 땅에 공이 크레이터를 만들며 터져나갔다. 유우가 서 있던 자리에도 흙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언제 봐도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어택이었다. 누구야!! 크게 소리를 치며 나온 교장선생님은 상황을 파악한 후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누르며 다시 메워두라고 소리를 치곤 방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범인이 나나마츠 코헤이타인 것을 이미 짐작한 모양이었다.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짓던 코헤이타는 시선을 돌리다 유우를 발견했고, 오랜만에 보는 친우가 무척이나 반가웠던 모양인지 단번에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저 멀리서 각각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이 코헤이타를 쫓아 흐느적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유우는 어색하게 웃다 제 목에 가해지는 힘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휘청거렸다.

 

유우!”

 

아파, 코헤이타.”

 

냐하하하!! 엄살은!”

 

네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거든?”

 

장난삼아 유우의 목에 팔을 휘감은 코헤이타가 그의 몸을 잡아주며 호탕하게 웃었다. 체육위의 활동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인지 처음 보는 1학년이 다리를 멈추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숨을 골랐고,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숨을 몰아쉬던 츠기야 산노스케가 유우를 힐끔 보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어 인사를 받은 유우는 시선을 돌려 타키야샤마루를 보았다. 아직 미숙해보여도 상급생은 상급생인지, 산노스케나 조그만 1학년 보다는 안정적인 상태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해오는 소년에게, 유우는 눈을 휘며 가볍게 웃어주었다. 5학년 못지않게 많은 시간을 함께 해온 아이였지만 타키야샤마루와 유우는 개인적인 친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의 동실이 저와의 친분을 전부 가져간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그래서 왜 온 거야? 오랜만에 단련하자는 건가!”

 

막 돌아온 사람이랑 단련하고 싶어?! 신입생들한테 인사하러 다니고 있거든!”

 

, 그런가. 어이 킨고! 인사해! 이반의 유우다!”

 

, 안녕하세요! 1학년 하반 미나모토 킨고라고 합니다!”

 

기겁하며 고개를 젓는 태도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코헤이타가 킨고를 불러 통성명을 마치자 유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예전부터 이랬지. 중얼거리며 인사를 받은 유우가 제 이름을 아사히나 유우라고 정정하는 동안 코헤이타는 2학년의 토키토모 시로베를 일으켜 세웠다. 방금 전까지 헉헉거리며 뛰던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아직도 이마 위로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채였다.

 

아직 달릴 코스는 많이 남았어! 냐하하하!”

 

선배, 또 달리시려고요?! 배구하기 전에 이미 뒷산에 다녀왔잖아요!”

 

!”

 

으아아아아아!!”

 

뒷산을 한 번 달린 것으론 부족했는지 더 달리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는 코헤이타의 모습에 시로베와 산노스케가 비틀거렸고, 킨고는 유우와 대화하던 것을 멈추며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이거, 애들 죽겠는데. 흘긋 타키야샤마루에게 시선을 던지자 머뭇거리기는 무슨. 자신을 보며 절박한 표정을 짓는 타키야샤마루의 모습에 유우가 작게 한숨을 쉬며 코헤이타의 어깨 위로 팔을 턱하니 얹었다.

 

코헤이타.”

 

왜 그래, 유우!”

 

오늘은 무리고, 내일 대련하는 건 어때? 그 때를 위해 푹 쉬어두라고.”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코헤이타가 씩 웃음을 지었다. 좋아! 꽤 흔쾌히 나온 대답에 킨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헤 벌렸다. 그 나나마츠 선배가. 무언가에 홀린 듯 내뱉은 말에 타키야샤마루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또한 처음엔 코헤이타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우는 제 목에 둘러진 팔을 치워내며-코헤이타가 힘을 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방으로 가보라며 손짓했다.

 

그럼 해산! 지치지도 않는지 전혀 변하지 않은 속도로 달려가는 코헤이타의 모습에 체육위의 아이들이 하나둘씩 주저앉았다. 정말, 코헤이타 선배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야. 헉헉대며 말하는 킨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유우가 웃음을 지었다. 그 녀석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는 거야. 정말요? 불신에 가득 찬 눈빛이 보이자 유우는 곤란해졌다. 아무래도 아직 이해하기엔 어린 아이겠구나 싶었다.

 

예전에 조금 일이 있었거든. 그래서 제 선에 들어온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그건 알려주기 힘들고. 정도는 심하지만저 녀석은 6학년 중에서 제일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니까. 적이 되면 제일 무섭겠지.”

 

나나마츠 선배랑 적이요?! 그거 무리잖아요!”

 

, 네가 프로닌의 세계에 나갈 때면 코헤이타도 엄청난 경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 당연하지.”

 

다만 걱정되는 건 너희가 코헤이타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단 거겠지만. 뒷말을 삼킨 유우가 손을 마저 움직여 킨고를 토닥였다. 마음에 칼날이라 쓰고 닌자라 읽는다. 프로닌이 된다면 그 이전의 연이 어떠했던 제 자신이 우선순위에 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사쿠나 도이 선생님은 우수한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닌자에 어울리지 않았다. 코헤이타야알 수 없는 녀석이니, 예상 외로 닌자에 적합할 지도 모르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유우는 아이들에게 나중에 보자며 인사를 하고 빠르게 생물위 쪽으로 향했다. 가장 걱정되는 후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 * *

 

 

토리와카~ 이거 어디다 둬야해?”

 

타케야 선배가 저 우리 옆에 두라고 하셨어!”

 

마고지로, 그것 좀 가져와줘!”

 

, . 알았어.”

 

다른 위원회에 비해 많은 수의 신입생들이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는 광경을 본 유우가 쓰게 웃었다. 바로 위의 선배가 졸업하면서, 지금의 6학년 중에서는 생물위원장을 맡을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본래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지만. 그리운 얼굴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유우는 제 뺨을 가볍게 두드리곤 제 키보다 큰 판자를 낑낑거리며 옮기는 신입생의 손에서 물건을 쏙 빼내었다.

 

어라? 제 손이 비는 것을 느낀 유메사키 산지로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좀 전에 보았던 미인이 웃는 얼굴로 판자를 들고 있는 모습에, 산지로는 입을 벙긋거리며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무거운 건 선배를 좀 시켜도 될 텐데 말이야.”

 

아사히나 선배?”

 

마고헤이. 너는 생물에게서 좀 눈을 돌릴 필요가 있어.”

 

하지만 쥰코는 저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인 걸요! 그치, 쥰코~”

 

애정을 들이붓기만 하면 소용없다니까.”

 

고개를 저은 유우가 타케야는 어디에 있냐며 묻자 마고헤이는 잠시 연장을 챙기러 갔다며 대답했다. 보러 온 사람이 부재중이라니, 이 무슨 불운이야. 뚱하니 내뱉은 말에 산지로가 정신을 차리며 제가 다녀올까요! 하며 급하게 달려갈 준비를 했다. 이제 곧 오겠지. 신경 쓰지 마. 손을 내저은 유우가 휘적휘적 걸어가 우리 옆에 판자를 내려놓았다.


WRITTEN BY
카키_bean
☆오리캐 출몰 주의 구역★ 하이큐&닌타마 중심 드림을 쓰는 블로그. 백업용.

,




“하즈키, 다시.”


엄격함으로 잔뜩 꾸며낸 목소리가 매섭게 나를 내리쳤다. 내 실력에 도움이 되어주기 위해 매정한 언사를 지어내시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손가락이 나가지 않는 상황에 들으니 괜히 서러웠다.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건반 위에서 다시 손을 움직이자 피아노는 경쾌하고 가벼운 선율을 뱉어냈다. 다음은…. 악보를 의식하며 다음 마디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등 뒤로 한기가 지나갔다. 계속 막히는 부분이 코앞이었다.


대회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싶다. 생각의 끈이 잠시 피아노에서 벗어나자마자 파를 쳐야했던 약지는 그 옆에 있던 솔을 누르고야 말았다. 낭패다. 실제 대회에서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주를 멈추지 않고 악보를 따라 손을 움직였지만 이미 머릿속은 꼬이고 꼬여서 연주에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나를 알아챈 사토 선생님은 한숨을 쉬더니 손뼉을 두어 번 치셨다.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


풀이 죽은 목소리와 함께 피아노 건반 위로 천을 덮자 선생님의 손이 내 머리 위로 얹어졌다. 힘들지?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자 금방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져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낮게 깔린 목소리에 지쳤다는 마음의 소리가 듬뿍 묻어나왔지만 등을 꼿꼿이 세워 피아노 악보를 정리했다. 선생님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토닥여주셨다. 조금만 더 힘내자, 하즈키.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이명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처음 피아노를 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연습을 거른 적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노력을 동반한 채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천재라는 소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떤 분야의 천재라도 노력이 없다면 그저 잘난 척하는 수재일 뿐이다. 이것이 내 지론이었다.


“아참. 네가 없을 때 니시노야군이 왔다 갔었어.”


“네?”


유우가? 평소엔 음악실에 얼씬도 하지 않는 녀석이 웬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후 웃음을 지은 선생님이 얇은 레몬색의 카디건을 걸쳤다. 전해줄 게 있는 모양이던데, 일찍 끝났으니 가보는 게 어때?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는 내가 배구부에 찾아가기를 은근히 원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요즘 생각이 많으니 친구를 만나 머리를 식히고 오라는 의미일 것이다.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대답을 하자 기쁜 눈치로 나를 보던 선생님은 먼저 가보겠다며 가방을 챙겼다.


사토 선생님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악보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공부를 하러 학교에 오는 것이 아닌 만큼, 가방의 무게는 다른 아이들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오늘은 딱히 정리할 것도 없었기에 피아노의 뚜껑을 잘 닫은 후 음악실을 나와 문을 잠갔다. 이 교실을 독점하는 나에게 주어진 특권 중 하나인 열쇠를 가방에 잘 넣고 걷자 운동장 쪽의 창가에서 축구부 아이들의 외침이 들렸고 이내 뻥 차는 소리와 함께 공이 하늘을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라, 하세쿠라양. 지금 끝난 건가요?”


“네. 오늘은 일찍 끝났어요. 타케다 선생님은….”


“배구부의 일로 잠깐 교무실에 볼일이 있어서요.”


계단을 내려와 배구부가 있는 체육관 쪽으로 몸을 돌리자 현대문학을 담당하시는 타케다 선생님과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배구부 고문이셨지. 마침 잘됐다 싶어 유우가 있냐고 물어보자 잠시 고민하던 선생님은 체육관에서 리시브 연습을 하고 있을 거라며 일러주셨다. 감사함에 고개를 꾸벅 숙이곤 체육관을 향해 걷기 시작하니 신발이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와 공이 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엉? 무슨 일이야?”


“유우… 그러니까 니시노야가 저를 찾았다는 말을 들어서요.”


체육관에 들어가자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여 뒤로 넘긴 남자가 용무를 물어왔다. 코치나 감독인가 싶어 질문에 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쪽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이 니시노야! 그와 같은 방향에 시선을 두니 유우가 땀범벅인 모습으로 리시브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반가워 가볍게 손을 흔들자 하즈키! 하는 외침과 함께 유우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슬쩍 주변을 보니 다들 이쪽에 한두 번 정도 시선을 두었다가 제 할 일을 이어서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엑? 네가 나 찾았다면서.”


“오오, 그랬지! 프린트가……부실에.”


“으음….”


하긴 이런 시간에 내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으리라. 평소엔 이보다 두 시간 정도 더 늦게 끝나 집에 돌아가곤 했기에 유우가 미처 생각을 못하고 부실에 두고 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유우를 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유우를 기다려야 하는데, 잠시 배구부 일을 도우면서 있어도 될까요?”


“음…. 뭐 상관은 없겠지. 시미즈한테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일을 분담해 달라고 해봐.”


꽤 흔쾌히 떨어진 허락에 해냈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우에게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유우는 크게 웃은 후 오늘 하루 동안 잘 부탁한다며 내 등을 팡팡 쳤다. 윽. 너 운동하는 남학생이거든. 유우에게 있어서 나는 분명 성별만 다른 친구임이 틀림없었다. 아파! 유우와 반대방향으로 슬슬 물러나자 그는 미안하다며 산뜻하게 사과를 하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 또한 들고 있던 가방을 눈치껏 구석에 내려놓고 꽤 미인상인 여선배의 곁으로 다가가 사정을 설명했다. 자신을 시미즈 키요코라고 소개한 선배는 가지런히 놓여있는 물병들을 가리켰다.


“그럼 다른 건 다했으니까 애들 오면 같이 드링크랑 타월 좀 나눠줄래?”


“네, 이것들 말하시는 거죠?”


“응. 부탁할게.”


시미즈 선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휴식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몰려오는 남학생들을 보며 물병을 챙겨든 나는 가장 먼저 들어온 키 큰 노란머리의 남학생에게 물병을 건넸다. 가볍게 목례를 하며 감사하다 말한 남학생은 금방 나를 지나쳐 갔고, 그 다음에 다가온 주황머리의 남학생은 물병을 받지 않고 나를 보다가 뒤에 서있던 검은 머리의 남학생에게 잔소리를 듣곤-거의 폭언 수준인 것 같지만-툴툴거리며 물병을 받고 비켜섰다.


감사합니다. 무뚝뚝한 인사에 미소만 지은 나는 놓아두었던 물병을 전부 나눠주고 바로 타월을 집어 2학년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향했다. 타월 필요한 사람? 내 말에 다들 손을 내밀어 타월을 받아갔고, 마지막 남은 것을 타나카에게 나눠주자 시미즈 선배가 수고했다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셨다. 그냥 나눠준 것 밖에 없는데…. 머쓱해져 볼을 긁적이고 있자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응?”


“새로운 매니저분…인가요?!”


아까 나에게서 물병을 받아갔던 주황머리의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으니 1학년일까. 고개를 저으며 오늘만 임시로 돕는 거라 답하자 아이는 조금 실망한 듯 늘어졌다. 유우의 친구라는 말을 살짝 덧붙이자 아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조금 전에 니시노야상이 선배를 부르는 걸 들었으니까요! 밝게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동생이 생긴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머리를 토닥였다.


“에?”


“아차….”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했어.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속담을 상기하며 어색하게 웃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손버릇 좀 고쳐야지….

'드림 > 하이큐' 카테고리의 다른 글

[vivace!] 01. Largo (2)  (0) 2015.11.30
[vivace!] 01. Largo (1)  (0) 2015.11.30
[vivace!]00. 모든 일의 시작  (0) 2015.11.30
Vivace! 기본 설정  (0) 2015.11.30

WRITTEN BY
카키_bean
☆오리캐 출몰 주의 구역★ 하이큐&닌타마 중심 드림을 쓰는 블로그. 백업용.

,




배고프다. 입에 물린 빨대를 질겅질겅 씹자 슈쨩이 이가 안 좋아진다며 타박을 주었다. 내 오빠세요? 빈 초코우유 팩을 반듯하게 눌러 접은 후 휴지통에 넣었다. 밥을 안 먹고 다니니 네 체력이 그 모양 아니냐, 안 그래도 저번에 영양실조로 쓰러졌으면서 너무 안이하다 하는 잔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나는 친구를 만난 게 아니라 보모를 만난 것 같아…. 한숨을 쉬며 말하는 나에게 슈쨩은 이게 다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냐며 눈을 치켜떴다. 네, 제가 죄인이죠. 죄를 실토하며 시계를 힐끔 보자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약 십오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슈쨩, 반으로 가야하는 거 아니야? 다음 체육이라며.”


“아~ 그게 좀 일이 있어서. 여기 있으면 치카라가 올 거야.”


“? 뭐야. 사고라도 쳤어?”


장난스레 웃자 슈짱이 내가 너같냐며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아, 여자애 머리는 건드는 거 아니래도.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다 방금한 말이 걸려 눈을 도르륵 굴렸다. 잠깐. 나?


“내가 뭘했는데….”


“어이고, 진심으로 물어보는 거야? 너 저번에 니시노야랑 썰매 탄다고-.”


“악악악악!!!”


내 흑역사를 폭로하려는 입을 급히 막으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보통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로 쏠리기 마련일 테지만, 슈쨩과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음악실을 둘이서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논외였다.


“신학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됐는데 잊지, 좀!”


안 들린다, 안 들려. 도시락에 놓인 계란말이를 후벼 파며 중얼거렸다. 젓가락으로 만든 틈 사이로 잘게 썰어진 당근이 보여 인상을 팍 구겼다. 난 이 세상에서 익힌 당근이 제일 싫어. 우리 엄마의 취향이어서 예전부터 먹어오긴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들어간 계란말이를 좋아한다. 빨리 먹어치우려 정갈하게 말린 계란을 작게 잘라 한 입에 넣자 슈쨩이 킬킬 웃으며 내 이마를 검지로 톡톡 쳤다.


“누가 그렇게 일 벌려놓으래? 하세쿠라 하즈키양.”


“어린 날의 치기라고 생각해줘…. 쪽팔리니까….”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풀네임으로 부르는 슈쨩의 모습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제발 그런 행동은 삼가줄래, 제발. 십년지기 소꿉친구가 갑자기 작업걸듯이 이야기하면 적응이 안 된다. 물론 본인은 자각이 없겠지만. …이게 바로 시키가 말하던 천연? 그런 건가? 인기가 많은 소꿉친구 덕에 나는 죽어나갈 뿐이지만.


아직도 전해주지 못한 러브레터들이 수두룩했지만 차마 밥 먹는 애에게 그 작은 봉투들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음, 좀 이따 줘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밥을 푹푹 퍼먹자 슈쨩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오늘은 좀 늦게 끝났네? 보통은 점심시간만 되면 바로 끝나잖아.”


“음, 조금 일이 있어서.”


아무래도 방학동안 연습을 좀 게을리 한 것이 원인인지, 항상 매끄럽게 지나가던 부분이 뻣뻣해졌다는 지적을 들었다. 그 때문에 연습이 좀 길어졌고 본의 아니게 슈쨩을 조금 기다리게 했다. 어느새 깔끔하게 비운 도시락의 뚜껑을 덮는 슈쨩에게 편지를 전해주려 밥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지만 때맞춰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에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순한 인상의 남자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엔노시타군? 나의 부름에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엔노시타군의 시선이 슈쨩을 향했다.


“하세쿠라양하고 같이 있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이제 가야해 슈.”


“응, 갈게. 나중에 보자 하즈키.”


“나중에 봐~”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엔노시타군과 슈쨩을 보내자 음악실 안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역시 이 이상 먹기는 힘들겠네. 엄마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전하며 아직 삼분의 일 정도가 남은 도시락을 덮었다. 역시 조용할 때는 피아노가 최고인 걸. 도시락을 한 쪽으로 치운 후 물병에 든 물을 입에 머금고 굴렸다. 하필 오늘 칫솔을 안 챙겨올 건 뭐람.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물병의 뚜껑을 돌려 닫고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았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에 기분이 좋아 웃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좋은 소리를 들려줘.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





“배구부, 즐거워 보이지?”


“별로.”


츠키시마의 대답은 매몰찼지만 야마구치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옆을 걸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기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안 좋은 일이 있었어도, 츠키시마의 일상에는 여전히 배구가 있었다. 언젠가 그가 배구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야마구치는 자판기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나 자판기에서 음료수 좀 뽑아 갈게.”


“…늦지 않게 와. 혼나지 말고.”


“응. 나중에 봐 츳키!”


제 친구를 먼저 보낸 야마구치는 자판기 앞에 서서 죽 나열되어 있는 음료수 캔을 유심히 보았다. 그냥 요구르트로 할까.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던 야마구치가 요구르트 아래에 위치해 있는 버튼을 눌렀다. 음료수가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은 야마구치는 어느새 작게 들려오는 선율을 눈치챘다.


‘……피아노?’


음악실이 근처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야마구치는 고개를 들어 건물 위를 보았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악실의 위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은 탓이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청아한 느낌이 들었다. 야마구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 종소리에 정신을 차리고선 허겁지겁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드림 > 하이큐' 카테고리의 다른 글

[vivace!] 01. Largo (3)  (0) 2015.11.30
[vivace!] 01. Largo (1)  (0) 2015.11.30
[vivace!]00. 모든 일의 시작  (0) 2015.11.30
Vivace! 기본 설정  (0) 2015.11.30

WRITTEN BY
카키_bean
☆오리캐 출몰 주의 구역★ 하이큐&닌타마 중심 드림을 쓰는 블로그. 백업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