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ace!] 01. Largo (3)
“하즈키, 다시.”
엄격함으로 잔뜩 꾸며낸 목소리가 매섭게 나를 내리쳤다. 내 실력에 도움이 되어주기 위해 매정한 언사를 지어내시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손가락이 나가지 않는 상황에 들으니 괜히 서러웠다.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건반 위에서 다시 손을 움직이자 피아노는 경쾌하고 가벼운 선율을 뱉어냈다. 다음은…. 악보를 의식하며 다음 마디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등 뒤로 한기가 지나갔다. 계속 막히는 부분이 코앞이었다.
대회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싶다. 생각의 끈이 잠시 피아노에서 벗어나자마자 파를 쳐야했던 약지는 그 옆에 있던 솔을 누르고야 말았다. 낭패다. 실제 대회에서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주를 멈추지 않고 악보를 따라 손을 움직였지만 이미 머릿속은 꼬이고 꼬여서 연주에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나를 알아챈 사토 선생님은 한숨을 쉬더니 손뼉을 두어 번 치셨다.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
풀이 죽은 목소리와 함께 피아노 건반 위로 천을 덮자 선생님의 손이 내 머리 위로 얹어졌다. 힘들지?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자 금방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져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낮게 깔린 목소리에 지쳤다는 마음의 소리가 듬뿍 묻어나왔지만 등을 꼿꼿이 세워 피아노 악보를 정리했다. 선생님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토닥여주셨다. 조금만 더 힘내자, 하즈키.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이명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처음 피아노를 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연습을 거른 적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노력을 동반한 채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천재라는 소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떤 분야의 천재라도 노력이 없다면 그저 잘난 척하는 수재일 뿐이다. 이것이 내 지론이었다.
“아참. 네가 없을 때 니시노야군이 왔다 갔었어.”
“네?”
유우가? 평소엔 음악실에 얼씬도 하지 않는 녀석이 웬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후 웃음을 지은 선생님이 얇은 레몬색의 카디건을 걸쳤다. 전해줄 게 있는 모양이던데, 일찍 끝났으니 가보는 게 어때?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는 내가 배구부에 찾아가기를 은근히 원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요즘 생각이 많으니 친구를 만나 머리를 식히고 오라는 의미일 것이다.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대답을 하자 기쁜 눈치로 나를 보던 선생님은 먼저 가보겠다며 가방을 챙겼다.
사토 선생님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악보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공부를 하러 학교에 오는 것이 아닌 만큼, 가방의 무게는 다른 아이들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오늘은 딱히 정리할 것도 없었기에 피아노의 뚜껑을 잘 닫은 후 음악실을 나와 문을 잠갔다. 이 교실을 독점하는 나에게 주어진 특권 중 하나인 열쇠를 가방에 잘 넣고 걷자 운동장 쪽의 창가에서 축구부 아이들의 외침이 들렸고 이내 뻥 차는 소리와 함께 공이 하늘을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라, 하세쿠라양. 지금 끝난 건가요?”
“네. 오늘은 일찍 끝났어요. 타케다 선생님은….”
“배구부의 일로 잠깐 교무실에 볼일이 있어서요.”
계단을 내려와 배구부가 있는 체육관 쪽으로 몸을 돌리자 현대문학을 담당하시는 타케다 선생님과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배구부 고문이셨지. 마침 잘됐다 싶어 유우가 있냐고 물어보자 잠시 고민하던 선생님은 체육관에서 리시브 연습을 하고 있을 거라며 일러주셨다. 감사함에 고개를 꾸벅 숙이곤 체육관을 향해 걷기 시작하니 신발이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와 공이 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엉? 무슨 일이야?”
“유우… 그러니까 니시노야가 저를 찾았다는 말을 들어서요.”
체육관에 들어가자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여 뒤로 넘긴 남자가 용무를 물어왔다. 코치나 감독인가 싶어 질문에 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쪽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이 니시노야! 그와 같은 방향에 시선을 두니 유우가 땀범벅인 모습으로 리시브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반가워 가볍게 손을 흔들자 하즈키! 하는 외침과 함께 유우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슬쩍 주변을 보니 다들 이쪽에 한두 번 정도 시선을 두었다가 제 할 일을 이어서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엑? 네가 나 찾았다면서.”
“오오, 그랬지! 프린트가……부실에.”
“으음….”
하긴 이런 시간에 내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으리라. 평소엔 이보다 두 시간 정도 더 늦게 끝나 집에 돌아가곤 했기에 유우가 미처 생각을 못하고 부실에 두고 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유우를 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유우를 기다려야 하는데, 잠시 배구부 일을 도우면서 있어도 될까요?”
“음…. 뭐 상관은 없겠지. 시미즈한테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일을 분담해 달라고 해봐.”
꽤 흔쾌히 떨어진 허락에 해냈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우에게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유우는 크게 웃은 후 오늘 하루 동안 잘 부탁한다며 내 등을 팡팡 쳤다. 윽. 너 운동하는 남학생이거든. 유우에게 있어서 나는 분명 성별만 다른 친구임이 틀림없었다. 아파! 유우와 반대방향으로 슬슬 물러나자 그는 미안하다며 산뜻하게 사과를 하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 또한 들고 있던 가방을 눈치껏 구석에 내려놓고 꽤 미인상인 여선배의 곁으로 다가가 사정을 설명했다. 자신을 시미즈 키요코라고 소개한 선배는 가지런히 놓여있는 물병들을 가리켰다.
“그럼 다른 건 다했으니까 애들 오면 같이 드링크랑 타월 좀 나눠줄래?”
“네, 이것들 말하시는 거죠?”
“응. 부탁할게.”
시미즈 선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휴식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몰려오는 남학생들을 보며 물병을 챙겨든 나는 가장 먼저 들어온 키 큰 노란머리의 남학생에게 물병을 건넸다. 가볍게 목례를 하며 감사하다 말한 남학생은 금방 나를 지나쳐 갔고, 그 다음에 다가온 주황머리의 남학생은 물병을 받지 않고 나를 보다가 뒤에 서있던 검은 머리의 남학생에게 잔소리를 듣곤-거의 폭언 수준인 것 같지만-툴툴거리며 물병을 받고 비켜섰다.
감사합니다. 무뚝뚝한 인사에 미소만 지은 나는 놓아두었던 물병을 전부 나눠주고 바로 타월을 집어 2학년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향했다. 타월 필요한 사람? 내 말에 다들 손을 내밀어 타월을 받아갔고, 마지막 남은 것을 타나카에게 나눠주자 시미즈 선배가 수고했다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셨다. 그냥 나눠준 것 밖에 없는데…. 머쓱해져 볼을 긁적이고 있자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응?”
“새로운 매니저분…인가요?!”
아까 나에게서 물병을 받아갔던 주황머리의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으니 1학년일까. 고개를 저으며 오늘만 임시로 돕는 거라 답하자 아이는 조금 실망한 듯 늘어졌다. 유우의 친구라는 말을 살짝 덧붙이자 아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조금 전에 니시노야상이 선배를 부르는 걸 들었으니까요! 밝게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동생이 생긴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머리를 토닥였다.
“에?”
“아차….”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했어.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속담을 상기하며 어색하게 웃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손버릇 좀 고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