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하이큐

[vivace!] 01. Largo (2)

카키_bean 2015. 11. 30. 20:50




배고프다. 입에 물린 빨대를 질겅질겅 씹자 슈쨩이 이가 안 좋아진다며 타박을 주었다. 내 오빠세요? 빈 초코우유 팩을 반듯하게 눌러 접은 후 휴지통에 넣었다. 밥을 안 먹고 다니니 네 체력이 그 모양 아니냐, 안 그래도 저번에 영양실조로 쓰러졌으면서 너무 안이하다 하는 잔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나는 친구를 만난 게 아니라 보모를 만난 것 같아…. 한숨을 쉬며 말하는 나에게 슈쨩은 이게 다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냐며 눈을 치켜떴다. 네, 제가 죄인이죠. 죄를 실토하며 시계를 힐끔 보자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약 십오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슈쨩, 반으로 가야하는 거 아니야? 다음 체육이라며.”


“아~ 그게 좀 일이 있어서. 여기 있으면 치카라가 올 거야.”


“? 뭐야. 사고라도 쳤어?”


장난스레 웃자 슈짱이 내가 너같냐며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아, 여자애 머리는 건드는 거 아니래도.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다 방금한 말이 걸려 눈을 도르륵 굴렸다. 잠깐. 나?


“내가 뭘했는데….”


“어이고, 진심으로 물어보는 거야? 너 저번에 니시노야랑 썰매 탄다고-.”


“악악악악!!!”


내 흑역사를 폭로하려는 입을 급히 막으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보통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로 쏠리기 마련일 테지만, 슈쨩과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음악실을 둘이서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논외였다.


“신학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됐는데 잊지, 좀!”


안 들린다, 안 들려. 도시락에 놓인 계란말이를 후벼 파며 중얼거렸다. 젓가락으로 만든 틈 사이로 잘게 썰어진 당근이 보여 인상을 팍 구겼다. 난 이 세상에서 익힌 당근이 제일 싫어. 우리 엄마의 취향이어서 예전부터 먹어오긴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들어간 계란말이를 좋아한다. 빨리 먹어치우려 정갈하게 말린 계란을 작게 잘라 한 입에 넣자 슈쨩이 킬킬 웃으며 내 이마를 검지로 톡톡 쳤다.


“누가 그렇게 일 벌려놓으래? 하세쿠라 하즈키양.”


“어린 날의 치기라고 생각해줘…. 쪽팔리니까….”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풀네임으로 부르는 슈쨩의 모습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제발 그런 행동은 삼가줄래, 제발. 십년지기 소꿉친구가 갑자기 작업걸듯이 이야기하면 적응이 안 된다. 물론 본인은 자각이 없겠지만. …이게 바로 시키가 말하던 천연? 그런 건가? 인기가 많은 소꿉친구 덕에 나는 죽어나갈 뿐이지만.


아직도 전해주지 못한 러브레터들이 수두룩했지만 차마 밥 먹는 애에게 그 작은 봉투들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음, 좀 이따 줘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밥을 푹푹 퍼먹자 슈쨩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오늘은 좀 늦게 끝났네? 보통은 점심시간만 되면 바로 끝나잖아.”


“음, 조금 일이 있어서.”


아무래도 방학동안 연습을 좀 게을리 한 것이 원인인지, 항상 매끄럽게 지나가던 부분이 뻣뻣해졌다는 지적을 들었다. 그 때문에 연습이 좀 길어졌고 본의 아니게 슈쨩을 조금 기다리게 했다. 어느새 깔끔하게 비운 도시락의 뚜껑을 덮는 슈쨩에게 편지를 전해주려 밥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지만 때맞춰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에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순한 인상의 남자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엔노시타군? 나의 부름에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엔노시타군의 시선이 슈쨩을 향했다.


“하세쿠라양하고 같이 있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이제 가야해 슈.”


“응, 갈게. 나중에 보자 하즈키.”


“나중에 봐~”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엔노시타군과 슈쨩을 보내자 음악실 안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역시 이 이상 먹기는 힘들겠네. 엄마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전하며 아직 삼분의 일 정도가 남은 도시락을 덮었다. 역시 조용할 때는 피아노가 최고인 걸. 도시락을 한 쪽으로 치운 후 물병에 든 물을 입에 머금고 굴렸다. 하필 오늘 칫솔을 안 챙겨올 건 뭐람.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물병의 뚜껑을 돌려 닫고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았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에 기분이 좋아 웃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좋은 소리를 들려줘.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





“배구부, 즐거워 보이지?”


“별로.”


츠키시마의 대답은 매몰찼지만 야마구치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옆을 걸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기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안 좋은 일이 있었어도, 츠키시마의 일상에는 여전히 배구가 있었다. 언젠가 그가 배구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야마구치는 자판기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나 자판기에서 음료수 좀 뽑아 갈게.”


“…늦지 않게 와. 혼나지 말고.”


“응. 나중에 봐 츳키!”


제 친구를 먼저 보낸 야마구치는 자판기 앞에 서서 죽 나열되어 있는 음료수 캔을 유심히 보았다. 그냥 요구르트로 할까.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던 야마구치가 요구르트 아래에 위치해 있는 버튼을 눌렀다. 음료수가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은 야마구치는 어느새 작게 들려오는 선율을 눈치챘다.


‘……피아노?’


음악실이 근처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야마구치는 고개를 들어 건물 위를 보았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악실의 위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은 탓이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청아한 느낌이 들었다. 야마구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 종소리에 정신을 차리고선 허겁지겁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